명성황후...민비의 생가. 즉 태어난 곳이다.

  지금까지 명성황후에 대하여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권력 다툼만을 일삼던 여인..그렇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해져온 이유는 일제 36년 동안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시켜온 탓이었다고 한다.  日本의 세력이 강해지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 외교의 균형을 갖추려 하였다. 여기서 일본의 미움을 받게 되고, 드디어는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인에 의하여 경복궁에서 살해되고 만다. 45세이었다. 소위 " 을미사변 "이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동학혁명이 전국을 휩쓸자, 조선을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군사파견을 요청한다. 일본도 이를 빌미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한다. 결국 淸日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 서양 삼국 즉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청일전재에서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치도 흔들리게 되는데, 이를 주시하던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에게 접근한다.

 

이에 일본은 1895년 10월8일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침입, 高宗을 위협하는 한편 피신하는 민비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가슴을 수차례 밟고, 이어 칼로 난자 살해하였으며, 그 시신을 궁궐밖으로 운반하여 소각하였다. 이때 변장하고 달아나는 민비를 대원군이 가르켜주었다고 한다. 이 을미사변은 아관파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 시각에서  요즈음 민비 즉 명성항후가 재조명되고 있으며 , 조선의 국모(國母)라고 일컬으며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되고 있다. 그 작품성은 별개로 하고, 명성황후에 대한  생가

(生家)의 안내문처럼  마냥 미화(美化)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죽음이 극적이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었던 점이 감성적인 애국심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가 입구에 공원이 조성되어있다.  항아리에 동전을 던져, 들어 가면  음악과 함께 분수가 올라 온다. 

 

 

 명성황후는 高宗 3년 1866년 ,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으로 16세에 왕비로 책봉된다.

그 후 대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고, 마침내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高宗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을 착수한다.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청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으며, 1882년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프랑스와 수교 이후 개신교의 포교가 허락되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조치들이 고종이 주도한 것인지, 민비가 주도한 것인지? 그 것은 잘 모르겠다.   민비가 영특하였음은 알겠지만, 여전히 안 좋은 선입관은 지울 수 없다. 그의 죽음도 조선의 운명에 묻혀 별 감동이 없다.

 

1886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 (梨花學堂)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6.25 동란 당시, 총탄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하마비(下馬碑)...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  즉, 이 비석 앞을 지나 갈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태종 13년, 1413년에  종묘와 대궐 문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한다.  王이나 장군,고관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졌고, 명성왕후의 생가(生家)가 있기 때문에 세워진 듯....

 

 

  이 生家는 본래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묘소를관리하기 위한 묘역이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 곳에서 살다가 1851년 명성황후 ( 민자영)을 낳는다.

 

  

 

 명성황후의 탄강구리비 (誕降舊里碑)....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비석으로 27대 순종의 친필이라 한다. 탄강(誕降)은 王이나 성인(聖人)의 탄생을 말하며, 구리(舊里)는 고향을 의미한다.

 

 

 

 

  1번 안채만 원래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복원한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민비에 대한 기록이 최근 발굴되었다. 고종과 민비를 가까이에서 모신 환관(宦官)의 기록이니 사실인 듯하다. 그녀가 풍악(風樂)을 몹씨도 즐겨했다는....

 

빨간색의 내용이 그 기록이다.

 

상감(고종)이 1864년에 즉위한 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19년동안 곤궁(坤宮..민비)은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시어 배우들을 궁중에 데려다가 노래 부르게 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묘기를 부리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 賞으로 하사한 金品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때문에 백성은 극도로 곤궁해지고, 국고는 탕진되어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배우들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었고, 軍人들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궁중에서는 비록 태평세월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민간은 만신창이가 된 빈사세상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하늘의 경고(천경.天警)"가 여러번 나타나고 人心이 흩어졌으니 武臣 변란인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몹시 가물어 논의 벼가 말라 죽고, 고을마다 화적떼가 들끓었다. 그래서 이 것을 하늘의 경고 즉 천경(天警)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섣부른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구군(舊軍)병사들을  70%나 감축하여 실업자로 만들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여덟달치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이럼에도 민비는 연일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한마리 개가 짖으면 두마리 개가 따라 짖는 법이고, 일시에 짖어대면 천백마리가 떼를 지어 짖어대는 법이다. 한사람의 군졸이 주동하여 일어나면, 두사람의 군졸이 주창하여 일어나고, 일시에 제창하여 일어나면 5천명의 군졸이 호응하여 일어나게 된다. 원래 5영(營)의 군인은 5,772명이었다.이와 같은 다수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군료(軍料..봉급)를 여덟달치 지급받지 못한 군사들의 분통과 원망이 쌓여 동심동력으로 일시에 들고 일어나니 고함지르는 소리와 하나로 합친 형세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고, 비가 거꾸로 쏟아 붓는 것 같았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것과도 같았다.

 

 

이때 군인들은 궁궐을 향해 돌진하면서 곤궁(坤宮..민비)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임오군란의 책임 소재가 민씨 일족에 잇었음을 말해주는 형세이었다.  

 

이에 곤궁께서는 크게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대궐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마을로 달아났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워 어찌할 수 없는 이때에 어디서인지 8척 장신의 사나이가 홀연 나타나더니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위험이 눈앞에 닥쳐왔사오니 황송하오나 빨리 저의 등에 업히소서..하고 두세번 재촉하였다. 경황이 없는지라 누구인지도 모르고 곤궁이 사나이 등에 업혀 수구문(水口門)밖으로 나갔다. 이때는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가까스로 가마 한대를 불러와서 숭례문을 빠져나가 곧바로 남태령고개를 향해 한강가로 나갔다..

 

이후 민비는 장호원으로 가서 一族인 민응식의 집에 피신한다.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그녀의 옷을 태워 장례까지 치룬다. 그리고 민비는 몰래 사람을 高宗에게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통보한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안채이다.  마루와 좌,우에 방들 그리고 맨 오른편에 광이 보인다. 명성왕후는 여기서 태어나,  8세까지 여기서 어린 시절을 지낸다. 어린 시절 이름은 민자영이었다.

 

生家의 미화(美化)된 안내문 말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사실 그대로 요약해 보자.  흥선대원군은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친정 가족이 별로 없는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맞아 들인다.

그러나 대원군의 의도와는 달리 민비(閔妃)는 소녀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수완이 능란하였다. 민비는 왕비가 된지 수년 후부터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高宗을 대신해 나라일을 보고 있던 대원군과 사사건건 다투는 처지로 발전한다.

 

최익현의 상소(上疎)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민비는 민씨 일파를 불러들이고, 대원군이 고집하였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시행하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한편,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극심해지면서, 부정부패로 인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1882년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민비는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민비는 고종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다음, 淸나라에 구원을요청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다. 淸나라는 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여 갔고, 민비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동학혁명으로 청나라 군대가 다시 조선에 들어 오자, 일본도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민비의 세력을 몰아 내고, 친일 개화파를 앞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민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몰아 내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1895년 8월8일 일본군대와 자객을 시켜 민비를 살해한 다음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친일정책을 펴던 정부는 민비를 평민으로 폐위(廢位)하였으나, 1895년 10월 다시 복권시킨다.  그리고   1897년 10월 고종(高宗)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 명성황후 (明成皇后) '

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궁이의 연통인 듯..... 특이하다

 

 우물, 텃밭, 장독대, 화장실.....

 원형 그대로.... 부엌이다.

 원형 그대로...광(壙)이다. 창고...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군이 경복궁에 도착한 것은 고종32년(1895) 8월20일 새벽 5시경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은 훈련대를 인솔하여 궁에 난입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훈련대 연대장인 홍계훈(洪啓薰)이 급히 달려와 저지하자 일본 수비대는 총격을 가해 홍계훈을 죽인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은 건청궁(建靑宮...경복궁의 뒷편 민비가 거처하던 곳))을 향해 졸진, 도착한 후, 일본군은 합문을 포위하고, 자객들이 건청궁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일본군들은 총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고 한다. 

 

자객들은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민비를 찾아내어, 내동댕이 친후 구두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당시에 이들은 민비의 얼굴을 잘몰랐기에 민비와 비슷한 용모의 宮女 3명도 살해하였다. 민비의 시신은 얼마 뒤에 궁에 들어온 미우라공사(公使)에 의하여 재확인되었고, 그의 지시로 증거를 없에기 위하여 불태워졌다. 시신을 문짝위에 얹고 이불을 덮어 건청궁 동쪽 녹원 숲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민비의 나이 45세이었다.

 

 

 다음 사진은 감고당이다.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해인사 원글보기
메모 :

개실마을....

연산군 무오사화 때 화(禍)를 당한 김종직의 5대손이 이 마을로 피신 와 은거하며 살던 곳...꽃 피는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마을이라 하였으나 , 그 후 줄여 개실마을이 되었다. 그 후 김종직의 후손들이 400여년간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을 이룬 마을이 된다.

 

무오사화(戊午史禍)란 ? 김종직은, 조카인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世祖)를 비판한 글(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썼었는데, 후일 연산군 시절 반대파가 이를 문제삼아, 사림파들을 죽이거나 축출한 사건이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관을 ?어내, 목이 베이는 화를 당한다.

 

 

 

 선산(善山) 김씨 문정공파(文定公派)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종택(宗宅)으로 1800년에 건립되었다.  김종직(1431 ~ 1492)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성리학,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종조(宗祖)로서, 성리학에 근거한 개혁 정치를 펼쳤다.  성종시대에 도승지, 형조판서를 지냈으나, 후일 연산군 시대의 무오사화로 무덤을 파헤쳐 다시 목이 베이는 소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그 후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 때 다시 복원된다. 그리고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김종직은 나의 36대  할아버지가 된단다...

 

 

 호(號)인 점필재의 뜻은... 책을 엿보는 집이란 의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이 화장실이다. 이제 이 마을도 여느 시골처럼 쇄락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대문이 정겹고, 옛 생각이 난다. 우리 집도 저런 대문이었는데....

 사당과 사당 뒷산의 대마무 숲

 

 도연재 (道淵齋) ...김종직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학자들이 고종 원년 1886년에 세워, 유학생을 가르치거나 제사를 준비한는 곳이다.

 

 

 

 

이 비석은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서울의 임금에게 향하는 진상품(進上品)을 서로 인수인계한 곳에 세운 비석이다. 합천군수와 고령 현감이 진상품의 인수인계 장소를 확정하고, 서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841년 1월에 세워진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부친인 김숙자(金淑滋)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은 원래 경북 선산 사람이었으나 모친 밀양 박씨와 결혼하면서 , 장인이 왜국 대마도 전투에서 전사하자 밀양으로 이사하여 김종직을 낳았다. 16세에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21세에 결혼하여 이듬해 1453년(단종1년)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가 3년동안 여막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성종시대에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1459년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한다. 성리학적 실천 윤리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수많은 문하생들이 함양으로 모여 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詩를 지어 시판을 걸어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지 않게 보고 있던 김종직은 그 시판을 떼어 불태워 버렸는데..이로 인하여 유자광과 감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후일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함양군수 시절 선정(善政)을 베풀어 1476년 선산부사로 승진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낙향,모친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띠집을 지어 지냈다.  세상 일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성종의 거듭된 벼슬길을 사양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한성부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종직의 학문은 고려 말 정몽주 및 길재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버지로부터 배워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으며, 문하생으로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남효온 등 수많은학자를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적 계통을 보면,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퇴계.이율곡 등으로 이어지는데, 길재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천적 방면에 힘을 쓴 것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당시 훈구공신파 일색이던 조정에 문하생들을 많이 진출시켜 신진 사림세력(士林勢力)을 형성함에 따라 훈구파와 심한 반목과 대립이 생겨났다.

1489년 (성종20년),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김천으로 내려 와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이 때 성종은 녹(祿)을 내렸으나  세번이나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이에 성종은 어사품을 내리고, 그의 청빈함을 듣고 경상도에 지시하여 쌀 70석을 내렸고, 의원을 보내 약을 하사하였다.

 

1492년 (성종23년), 밀양 외가에 갔다가 병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8월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고 애도하였으며, "문간"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난한 글)을 지은바 있는데, 연산군 시절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하생  33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며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나 , 주위에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오늘에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신원이 회복되고 영이정으로 추존되면서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해인사 원글보기
메모 :

맹사성 고택(故宅)...최영장군과 맹사성이 살던... 가장 오래 된 살림집이다.

 

 이 집은 1330년 (고려 충숙왕17)에 최영장군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지은 집이다.최영장군은 아산에 있는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長成하여 개성으로 벼슬길에 올라 유명한 장군이 되었다. 최영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은 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가르치며 엄격히 키운다.

 

최영장군과 고불(古佛), 맹사성은 이 곳에서 아래 윗집으로 같이 살았다. 古佛이 어렸을 때, 어느 날 최영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꾼다. 집 앞에 있는 배나무위에서 龍이 용트림하며 승천하려는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 마당으로 나온 최영은 배나무 위에서 놀며 배를 따고 있는 어린 맹사성을 발견한다. 최영은 " 뉘집 자식인고? " 맹사성은 조용히 부친의 함자를 대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물러났다.

 

그 아이의 부친 이름은 맹희도(孟希道)...얼마 전 科擧에 급제하여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찾아간 최영은 꿈이야기를 하며 맹씨 집안과의 인연을 만들어 간다.

 

후일 맹사성은 후일 최영장군의 손녀 사위가 되는데, 벼슬을 살 때에 또는 末年에 이 곳 은행나무 밑에서 후학들을 가르키며  지낸다.

 

 

 

 

지금 이 집은 맹사성의 21대손 맹건식이 살고 있으며, 그의 부인은 성삼문의 후손이다.

 

 

이 계단을 올라 가면 최영장군이 태어나고, 맹사성이 살았던 故宅이 나타난다.

 

 

700년 가까이 된...가장 오래 된 살림집이다. 원형 그대로... 벽만 보수하였을 뿐..

 

 

 

 청백리 (靑白吏)란?

 

관직 수행능력과 청렴, 도덕, 경효(敬孝) 그리고 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議政府)에서 뽑아 관료들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先祖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특권을 주기도 하였으며, 모두 219명이 청백리로 지정되었다.

 

그 중 친숙한 인물로 맹사성,  황희, 이황, 이현보, 김장생, 이항복 등이 있다. 황희정승이 청백리인가는 여러 다른 이야기가 있고, 그 점에 대하여는 "황희의 묘"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다. 결론적으로

황희는 요즈음의 정치인처럼 적당히 非利를 저지르고, 적당히 때가 묻은 고위관료이었지만, 워낙 환상적인 조합으로 聖君  世宗을 모셨기 때문에 청백리로 모셔진것 같다.

 

그러나 맹사성은 모든 면에서 청백리의 전형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최영장군이 헛기침하며 걸어 나오는 듯.. 너무 생생하다.

 

 

 

  

  

뒷마당의 모습... 굴뚝의 모습이  아름답고 이채롭다.

 

 

맹사성이 아홉살때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 가을에 다섯가마니의 은행을 수확한다고. 말년에 여기 은행나무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친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江湖四時歌)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興)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聊溪邊)에 금린어(金鱗魚)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閑暇)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다.

 

강호(江湖)에 녀름이 드니 초당(草堂)에 일이 없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난 보내나니 바람이로다.

이몸이 서날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다.

 

강호(江湖)에 가알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있다.

소정(小艇)에 그물 시러 홀니 띄어 더져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다.

 

강호(江湖)애 겨월이 드니 눈 기?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의의를 가지는 이 노래는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어..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던 당시의 시조풍이었던 충의사상(忠義思想)이 잘 나타나 있다.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존재하는 조화로움은 구성상의 특징에서 기인한다고 하겠으나, "역(亦)"이란 표현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亦이란 전에나 다름없이..라는 의미를 간직한 것으로 詩的 自我는 강호에서 한가롭게 자연을 즐기기 전에도 임금이 은혜를 입었슴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은사(隱士)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과, 비록 은둔하여 있으나 임금을 향한 충의(忠義)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는 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강호에 봄이 찾아드니, 참을 수 없는 흥겨움이 솟구친다. 

탁주를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 싱싱한 물고기가 안주로 제격이구나.

다 ?은 이 몸이 이렇듯 한가롭게 지냄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다.

 

강호에 여름이 닥치니, 초당에 있는 늙은 몸은 할 일이 별로 없다.

신의있는 강 물결은 보내는 것이 시원한 강바람이다.

이 몸이 이렇듯 서늘하게 보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다.

 

강호에 가을이 찾아드니, 물고기마다 살이 올라 있다.

작은 배에 그물을 싣고서, 물결따라 흘러가게 배를 띄워 버려두니

다 늙은 이몸이 이렇듯 고기잡이로 세월을 보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다.

 

강호에 겨울이 닥치니, 쌓인 눈의 깊이가 한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를 둘러 입어 덧옷을 삼으니

늙은 이 몸이 이렇듯 추위를 모르고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이시다. 

 

  

 

 

 

 

세덕사(世德祀)...맹사성과 아버지 맹희도 그리고 할아버지 맹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祀堂)이다.

할아버지 맹유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성 근처 동두문(東杜門)으로 피신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다.

 

이성계는 그들을 회유하려 모든 노력을 하였으나 그들의 절개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이성계는 하루의 말미를 주며 나오기를 권유하면서, 아니면 모두 불질러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안에 있던 충신들은 상의끝에 가장 나이 어린 황희를 내보내고 그들은 모두 불에 타 분사(焚死)한다.

 

이들 72명의 충신들을 두문72현(杜門72賢)이라 부르며, 맹사성의 할아버지 맹유도 그렇게 죽는다. 이성계가 아무리 나오라고 회유,협박하여도 끝내 나오지 않았고 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의 유래가 된다.

 

그 당시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는 서두문(西杜門)에 숨어 있다가, 아들 맹사성을 데리고 충청도 서천을 거쳐 이 곳 최영장군의 집으로 피해 와 은거(隱居)하게 된다.

 

이미 최영장군 역시 이성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이었다. 후일 맹희도는 조선 건국이 완료되고, 安定이 되자 아들 맹사성을 불러 벼슬길에 나가도록 권유한다.

 

 

 

  

 

 

英祖가 쓰고, 하사(下賜)한 " 충효세업, 청백가성 (忠孝世業, 淸白家聲) "..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즉 충(忠)과 효(孝)를 대대로 실천하여 왔으며, 청렴과 결백은 가문의 영예이다 ..라는 뜻이다.

 

 

기념관 마당 모퉁이에  그야말로 옛날식 화장실... 보기에 참 편하다.

 

 

은행나무(행. 杏)이 높은 단(壇)위에 있다 하여 여기를 맹씨행단(孟氏杏壇)이라 부른다. 孔子가 은행나무 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전례에서 따온 것이다. 돌담위의 이끼...세월의 흔적이다.

 

 

구괴정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해인사 원글보기
메모 :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生家...

 

 다산 정약용 (1762~ 1836)...조선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實學)을 집대성하였다. 실용지학(實用之學)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7893年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 무렵 西洋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접하게 된다.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나, 30대 초반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암행어사,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土地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계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한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토지의 사유(私有)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주장하여 농민들의 투하 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배분하자는 공동농장, 협동농장적 경영론이었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이러한 사회개혁론과 더불어 그는 저서 원목(原牧)에서 놀라운 정치적 주장을 전개한다. 즉, 옛날부터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하여 이장(里長), 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하였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일 민(民)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民은 자유의사로서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유럽의 사회개혁론과 유사한 것으로 政治의 민주주의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발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 불가능한 理想論이었고,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僻派)는 남인계의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하여 1801년 2월,천주교도(西學)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켰다.

 

이때 정약용은 그의 형인 약전(若銓), 약종(若鐘), 이승훈,이가환,권철신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2월27일 출옥과 동시에 포항으로 유배되었다가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곳에서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다산은 1818년,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 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鄕村 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다산은 18년동안의 유배생활에서 그 유명한 일표이서(一表二書)...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한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고, 목민심서에서는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바탕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 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였다. 흠흠신서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獄事)에 대하여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하고자 저술하였다,.

 

즉 경세유표는전국적 범위에서 국왕, 국가가 집행하여야 할 것들에 대하여 저술한 것이며, 목민심서는 군현(郡縣) 등 향촌(鄕村)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에 대하여 저술한 것이다.  

 

茶山은 이런 저술등을 통하여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 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商業의 경우 農業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여 했다. 상업을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中小商人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기술도입, 국가적차원의 토목기술 발전,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류유통을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 鑛山을 국영화함으로써 천연의 富에 대한 특권층의 恣意的 이용을 배제하여 그 이익을 소농민에게 돌리게 하는 등의 광산국영론 등을 주장하고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5년 일부 축소하여 복원되었다.

 

 

 

茶山은 그를 총애하던 正祖가 죽자 곧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관직 제의를 물리치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학술 연구에 전념한다.

 

코끼리가 살얼음판을 걷듯이, 원숭이가 주위를 항시 살피듯이 살아야 했으며,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는집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그렇게 살았다.

 

 

다산이 제기하는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朱子學)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1.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는데 반하여,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것으로 생각하였다.

 

2. 氣質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베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의 능력주의는 身分制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과거,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3. 욕망관(慾望觀)에 대하여,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망을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고 파악한 다산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는 주관적 심성문제에 치중하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구별되는 주장인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하였다. 이에 따라 천문, 기상(氣像),지리, 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관심을 갖고 ...볼록렌즈가 태양광선의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등을 밝혀냈다.

 

또한 각종 藥草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하여 생물학적 연구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하였다.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화성의 축조시 거중기, 고륜(鼓輪), 활차(滑車)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하였다. 이와함께 기예론(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 의학등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다산의 詩 한편 .....독소(獨笑....혼자웃다) 

 

유율무인식  (有栗無人食)         양식이 많은 집에는 자식이 귀하고

다남필환기  (多男必患飢)         아들 많은 집에는 굶주림이 있으며

달관필창우  (達官必猖愚)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자무소시  (才者無所施)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를 펼 길이 없으며

가실소완복  (家室少完福)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도상능지  (至道常陵遲)         지극한 도(道)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옹색자매탕  (翁嗇子每蕩)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부혜랑필치  (婦慧郞必癡)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어리석으며

월만빈치운  (月滿頻値雲)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화개풍오지  (花開風誤之)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물물진여차  (物物盡如此)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거야

독소무인지  (獨笑無人知)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歲寒松 원글보기
메모 :

추사 김정희 고택(故宅)

 

 김정희(金正喜)는  호(號)가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 등이며, 우리에게는 호(號)로 부르는 것이 더 친숙하고, 멋스럽다. 이 외의 다른 호로는 예당(禮堂), 시암(詩唵), 과파(果坡), 담연재(覃硏齋),

보담재(寶覃齋), 노과(老果) 등이 있다.

 

추사는 1786년 6월3일, 이 곳 충남 예산에서 부친인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 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이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英祖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써, 현재는 23칸만 남아 있다.

 

추사는 이 곳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서기 전까지, 여기서 성장하였으며, 말년에는

生父인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다,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철종 7년)에 작고하였다. 벼슬하면서 3번의 유배 생활을 한다. 고금도(古今島), 제주도, 함경도 북청 등

총 12년의 귀양살이이었다.

 

 

秋史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英祖의 장녀 화순옹주와 결혼한 후, 서울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김한신은 집이 너무 크다고 임금에 상소하여 이 곳 고향으로 집을 뜯어 그대로 옮겼다. ( 다른 얘기도 있다. 당시 서울의 士大夫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충청도지역에 전답 등을 별도로 확보하여, 생계의 근거로 삼거나, 여가를 보냈다. 그래서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지만... 김한신의 경우는 이 후자의 사례이다. 英祖가 사위에게 고향 땅을 下賜하였다는 얘기도 있고...이 故宅을 건립할 때, 각 지방의 수령들이 1칸 씩 맡아 총53칸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金興經)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英祖의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38세에 죽었다. 김한신은 그 자체의 학문과 인품으로 크게 벼슬할 수 있었으나, 왕실 사위의 관직 금지라는 제도로 인하여, 학문과 문학에 심취하였다. 그러한 제도적 굴레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는 특히 더욱 處身에 조심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부인 화순옹주는 김한신이 죽은 후 스스로 모든 음식을 끊어, 14일만에 김한신의 뒤를 따른다.  이곳 秋史의 묘에서 약 300m 지나서,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 묘가 있다.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바깥 소슬대문을 들어 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 집이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주택 개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이와 같이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충청도 양반"의 근거는?  추사 김정희는 충청도 양반이었다.

 

구한말의 지식인 황현(黃玹. 1855~1910)은 " 평양은 기생(妓生) 피해가 크고, 충청도는 양반(良班) 피해가 크고, 전주는 아전 (衙前. 하급관리) 피해가 크다. " 라고 지적하였듯이 충청도는 양반이 너무 많아서 양반의 피해 云云할 정도이었다.  그렇다면 왜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으며, 충청도가 양반 살기에 적당하였던 인문지리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1751년 (영조27)에 저술된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는 다음과 같이 충청도를 설명하고 있다.

 

남쪽의 半은 차령산맥(車嶺山脈)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半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物産)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지만, 산천이 평평하고 에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士大夫)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代를 서울에 살면서 이곳 충청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었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하고, 그 중에서도 내포(來浦)가 제일 좋은 곳이다. 가야산 앞뒤에 열개의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地勢)가 한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즉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우선 정치권력이 집중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교통의 이점과 山川이 평평하고 예쁘다는 風水的인 장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추사고택이 자리잡은 이 곳 내포(來浦)라는 지역이 난리를 겪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금과 생선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忠淸道에는 위압적인 山이 거의 없고,돌산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野山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흔히 충청도 산세(山勢)의 부드러움을 표현할 때 "개떡을 엎어 놓은 것 같다" 거나 "솜이불을 덮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그만큼 야트막한 둔덕같은 山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秋史故宅이 자리잡고 있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주변의 山勢 역시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은 충청도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추사고택은 솜이불 같이 포근한 기운을 풍기는 야트막한 둔덕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변사방 어디를 둘러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속살같은 이불뿐이요,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山이 전혀 없다. 살기(殺氣)가 없다는 의미이다.

 

 

추사고택 곳곳에 걸려 있는 추사의 글씨들... 그는 경학(經學), 금석학, 불교학 그리고 詩와 그림에 뛰어났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었지만, 특히 글씨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면 추사체(秋史體)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유흥준의 완당일지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간략히 정리하여 보면....

 

어릴때부터 뛰어난 글씨 솜씨로 사람들의 극찬을 받았고,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있었다. 중국 연경에서 옹방강(翁方綱) 등의 대가와 접촉하고 수많은 진적(眞跡)을 감상함으로써 글씨에 대한 안목은 더욱 향상되었다.

 

국내의 書道에 대하여 " 구서(舊書)의 어떠한 것도 모르고, 그후에 자기류의 서법으로 널리 자랑하며 가(家)마다 진체(晉體)요, 호(戶)마다 왕희지(王羲之)라. " 하여 철저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원래 명나라의 동기창(董基昌)의 書法을 따르고 있었는데, 연경에 가서 농후하고 기골이 강한 옹방강(翁方綱)의 서체를 본받게 되었다.  이후 옹방강이 숭상하는 송(宋)의 소식(蘇軾)의 서체를 따르게 되었고, 훗날 해서(偕書)의 모범이 되었던 당(唐)의 구양순(歐陽詢)의 서법까지 익히게 되었다. 더욱 나아가 한예(漢隸)의 서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예서를 익히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흉?(胸中)에 고아청고(高雅淸高)함이 없으면 예법(隸法)을 쓸 수 없고, 흉중의 고아하고 청고(淸高)한 뜻은  흉중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아니하면 나타 낼 수 없다...라고 하여 예서(隸書)를 書의 조가(祖家)로 보았다.

 

이처럼 모든 대가들의 장점과 다양한 서체를 집성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서법을 이룬 것이 바로 추사체(秋史體)이다.   당대의 학자들은 추사체에 대하여 " 신기(神氣)가 내왕하여 마치 바다와 같고, 조수(潮水)처럼 보인다 " 라고 평하였다.

 

 

난방용 부뚜막만 있고, 밥 짓는 부엌은 따로 있다. 王室 가족에 대한 예의이란다.

 

 

 

안채...안채에는 부엌도 없고, 나무 한그루 자랄 수 없게 만들었단다. 집 모양이 "ㅁ"형태로 그 안에 나무(木)이 자라면 곤혹스러울 곤(困)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곳 안채에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와 그의 부인, 英祖의 둘째딸 화순옹주가 시집와 살았다.

 

 

 

안채에 세한도(歲寒圖)의 영인본이 걸려 있다. 제자 이상적에게 보내는 글과 그림이다. 그 내용은.....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은 보아라..로 시작한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작년에도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올해에도 또 우경(藕莖)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 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리 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리니...

 

세상의 도도한 人心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같이 마음과 힘을 들였거늘, 이것들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갖다 주다니...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런 풍조 속에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대는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一年中에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사철을 통하여 세한(歲寒)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푸르지만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 주거늘...나의 곤경 이전에는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 부터 칭찬을 들을 만 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세한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한나라 시경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때 ,급암과 정당시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興하고 衰하였으며,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 붙인 것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 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 노인 씀.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1844년 김정희 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동안에 제자인 우선,이상적 (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들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師弟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歲寒松)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김정희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

 

이상적은 추사보다 18세 年下의 中人이었다. 秋史는 다가오는 새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위주로 제자를 길러냈으니 그 門下에는 진보적 양반 자제는 물론 中人과 庶孼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12번이나 중국에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文士들과 교류를 깊이 하였다.그는 특히 詩로 명성을 크게 얻어 1847년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에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른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을래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데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시문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이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멋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은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이 되어 北京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정초에 淸나라의 文人 16인과 같이 한 자리에서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격하여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은 이것을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제주도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었다.

 

1年이 지나, 세한도를 다시 대하게 된 秋史의 휑한 가슴에 저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적은 나중에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들고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겼다.

 

지기평생존수묵  (知己平生存水墨)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이었네

소심난우세한송  (素心蘭又歲寒松)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스승 김정희가 그려준 세한도는 제자 이상적의 평생이 가치있는 것이었슴을 대변해 줄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다.  세한도는 그려진 연유에도 곡절이 있었거니와, 그려진 이후에도 천하를 유랑한 行路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애초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중국 연경(燕京)까지 다녀왔던 이 작품은 다시 제주도 스승에게 보인 후에 물론 이상적의 소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이란 사람의 소장품이 된 것을, 그의 아들 김준학(金準學)이 물려받아 2代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이르러,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이었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카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현해탄을 건너고 말았다.

 

그러나 종전(終戰) 직전에 우리나라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일본 동경으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비오듯 퍼붓는 폭격기의 공습 위험을 무릎쓰고, 석달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조국땅을 밟게 되었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하고 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 많은 자료들은 결국 美軍의 폭격을 피하지 못하여 대부분 타버리고 말았다.  세한도는 그야말로 九死一生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었다.

 

그러나 세한도의 주인은 또 다시 바뀌게 된다. 죽음을 무릎쓰고 갖은 고생 끝에 되 찾아온 세한도..그 후 너무나 어이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손재형은 학회 할동, 진도중학교 설립..등 사회활동을 하다가 드디어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예술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資金이 쪼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書畵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 만큼,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저당잡히며 돈을 빌려 쓰기 시작하였다.

 

개성 상인 이근태(李根泰), 그는 信用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개성상인으로 가회동에서 살았다.  하루는 손재형이 찾아 왔고, 그의 손에는 김정희의 세한도, 단원(檀園)의 群仙圖, 겸재(謙齋)의 인왕제색도(仁旺齊色圖) 등이 들려 있었는데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서화들이었다.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 있던터라,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서까지 그 물건을 저당잡아 주었다. 그러나 손재형은 첫달부터 利子를 가져오지 않고, 정치활동에만 집착하였다. 이근태는 결국 자기 돈으로 이자를 물어가며, 결국에는 남의 돈을 빌려 남의 이자를 갚아야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근태 역시 古書畵를  좋아해  김정희, 대원군,정선, 심사정 등 거장들의 여러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그 그림들 역시 利子를 물기 위하여 모두 팔려 나갔다.

 

마침내 이근태 역시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이 없자,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하였다. 세한도 역시 개성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소장하고 있다. 1974년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國寶 제180호 지정되었다.

 

 

안채 뒷편에 사당으로 오르는 조그만 길이 있다.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해인사 원글보기
메모 :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있는 모여있는 _LA 비버리힐즈

할리우드 스타들에 상상불허 하는 집들...



 터미네이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후 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로 지내고 있는 그의 집
 아놀드 슈왈츠제네거_ Arnold Schwarzenegger
 터미네이터 4편의 출연은 안하지만 전성기 최고의 포스 만큼이나 집의 크기가 말해주는 것 같다.



 2002년 최고신인 아티스트상 을 받은 발랄한 스타일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여가수
 에이브릴 라빈 _Avril Lavigne
 LA에 위치한 300여 평의 초호화 저택으로 8개의 침실, 10개의 욕실을 포함해 엘리베이터·사무실·
 부엌, 스팀샤워실, 사우나, 수영장 온천과 자동차 10대를 동시에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까지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돌스타에서 컨트리 디바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녀
 캐리 언더우드_ Carrie Underwood
 2007년 그래미 어워드 신인가수상으로 인기가두를 달리고 있는 컨트리를 기반으로 팝록의 옷을 세련되게 입고 있듯 보인다.



 영화배우겸 인기 팝가수
 셰어_ Cher
 허스키한 목소리에 그녀의 노래 CHER - Dove La More' 가 흘러나오는듯 하다.



 헐리우드 빅 패밀리 부부

 데이빗 아퀘트 _David Arquette, 커트니 콕스_ Courtney Cox



 데이비드 듀코브니_ David Duchovny, 테아 레오니_ Tea Leoni
 엑스 파일로 유명세를 탄 데이비드 듀코브니 현 재작 기대작인 엑스 파일2'의 컴잉순~을 기대하고 있다.
 멀더 ~ 부부의 집 아니 멀더의 궁전 이라면 맞을듯.



 인기 코메디언'이자 인기 토크쇼, 여배우
 엘렌 드제너러스_ Ellen DeGeneres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위트와 재치가 돋보이던 2,400만 달러 그녀의 저택.


 
 사랑받는 할리우드 영화부부 
 개빈 로스데일_ Gavin Rosdale, 그웬 스테파니_ Gwen Stefani 
 스테파니와 로스데일은 할리우드의 톱스타 가족으로 많은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들의 인기 만큼이나 
 높은 인기를 자랑하듯 멋진 집의 모습이다.



 미 NBC 투나잇쇼 인기 진행자
 제이 리노_ Jay Leno
 할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이 금메달을 빼앗겼던 사건으로 인기코믹 이상의 비난을 쏟아졌던 그 진행자의 집.



 인기가도를 말해주듯 다이 하드 4'의 출연으로 모습을 보였던
 저스틴 팀버레이크 _Justin Timberlake
 인기가수에서 인기배우로 폼나는 그의 집 위에 제이 리노'의 대 저택과 언듯 비슷한 모양세이다.



 영화배우 켈리 프레스톤 부인과 함께하는 저택 그의 전용비행기'까지 비행장 시설까지 있는 저택
 존 트라볼타_ John Travolta 
 거실은 하나의 공항 대합실 컨셉트로 리모델링 되었고 거실에 앉아 있으면 마치 공항카페에 비행기 이착륙을
 보는듯 느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두 대의 제트 비행기가 동시에 안착해도 좋을 만큼의 격납 공간과 2.4 km의 활주로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크다.



 가수이자 배우인 마크 앤서니'와 가정을 이루는 제니퍼 로페즈'의 저택
 제니퍼 로페즈_ Jennifer Lopez, 마크 앤서니_ Marc Anthony
 신분 안전을 위해
잠든 시간에는 집 주위를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 7여명을 기용 각 방마다 CCTV를 설치해
 집안의 상황을 모니터실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유럽 미국 등 전세계에 퍼져 있는
을 합치면 모두 13개라고 밝힌,
 니콜라스 케이지_ Nicholas Cage
 한국인 부인 앨리스 킴'과 니콜라스 케이지'의 알콩달콩한 달콤함이 그려지듯 멋진 집은 감탄사를 자아낸다.




 미국 여성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쇼'로 인기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_ Oprah Winfrey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사회에서 흑인인 그녀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 당당하게 성공 막강한 부의 축적 만큼이나
 그녀가 사는 곳은 집이라기 보다는 성' 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미 유명 팝뮤지션 빌리 조엘_ Billy Joel 저택 
 집이라는 이미지 보다는 마치 대형 스포츠센타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부부의 명성 만큼이나 멋들어진 데이비드 베컴'과 빅토리아 베컴이 주거하는 영국에 저택.
 이비드&빅토리아 베컴_ David And Victoria 

 David and Victoria LA
 미국 LA에 저택.



 탑건의 인기가도로 현재까지 유명세를 타는 톰 크루즈'와 부인 케이티 홈즈'의 저택
 톰 크루즈_ Tom Cruise, 케이티 홈즈_ Katie Holmes

 비버리 힐즈에 위치한 대저택은 멋진 풍광으로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말리부에 위치한 대저택 마치 놀이공원을 하늘위에서 찍은듯 엄청난 규모의 집.
 윌 스미스_ Will Smith

 완전 궁궐이상의 마을이다' 라고 해야 맞을듯, 그져 입만 벌어질 뿐이다.




 팝 여가수로 엄청난 인기와 부의 축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호사한 저택.
 브리트니 스피어스_ Britney Spears
 베버리 힐스에 720만 달러 한화론 약 68억원에 구입 했다는 초호와 저택은 대체로 황색의 주조로 방마다 장식된 
 아름다운 샹들리에와 화려한 카펫등 온갖 장식품은 호사스러움에 절정을 달린다.

옮겨온글|서라벌_0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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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27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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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권용운의 한옥처럼 꾸민 아파트
소나무와 창호지, 돌기와로 꾸몄어요
기획·강현숙 / 사진·박해윤 기자

영화배우 권용운의 아파트는 한옥에 온 것처럼 정겹게 꾸며져 있다. 베란다에 툇마루를 짜 넣고, 커튼 대신 창호지를 바르고, 공간마다 한식 소품으로 포인트를 준 색다른 그의 집을 구경해보자.


 

베란다에 만든 시골 툇마루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칭찬과 부러움이 자자한 공간. 베란다에 한옥 짓는 나무로 툇마루를 짜 넣은 뒤 아랫부분은 배선을 정리해 공간을 활용했다. 베란다 창 역시 한식 느낌으로 모양을 만들고 커튼 대신 창호지를 붙여 한옥집의 분위기를 냈다.

경기도 덕소에 있는 권용운씨(40)의 아파트에는 한옥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겉에서 보면 일반 아파트와 똑같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골집에 온 듯 정겨운 한옥 풍경이 펼쳐愎?

마당이 딸린 주택에서 살던 그는 3년 전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양새를 갖춘 아파트가 영 취향에 맞지 않아 공사를 하게 됐다고 한다. 어릴 적 그가 나고 자란 시골집의 느낌, 한옥의 운치를 아파트에 담고 싶었던 것.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하기 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족회의라고. 온 가족이 모여 사는 공간인 만큼 식구들의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 김효선씨(40)와 아들 서구(14), 딸 서희(15)와 옹기종기 모여 집 꾸밈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우선 그와 취향이 비슷한 아내는 한식 스타일 인테리어에 대찬성! 어릴 적부터 시골 할머니 집에 자주 놀러가서 한옥에 익숙한 두 아이들도 흔쾌히 찬성했다.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서 우선 집의 창과 문을 한옥 스타일로 바꿨다. 거실과 현관, 주방의 창과 문을 한옥 짓는 나무로 모양을 만들고 창호지를 바른 것. 문고리도 모두 한옥 문고리로 교체했다. 집을 고치면서 그가 가장 신경을 쓴 곳은 거실로, 절을 짓는 목수에게 부탁해 베란다에 시골 툇마루를 짜 넣었다. 툇마루 위에는 나무를 잘라 탁자를 만들고 커다란 방석을 놓아 전통 찻집과 같은 분위기를 냈다. 현관은 바닥에 돌기와를 깔고 고가구 전문점과 시골집에서 가져온 한식 소품을 놓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권용운씨는 이사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볼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고 푸근함이 느껴진다며 집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커튼이나 패브릭 대신 나무와 한지를 사용해 먼지가 날릴 걱정도 없어 아이들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한옥의 숨결이 느껴지는 웰빙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대한다.

 

한식 느낌으로 제작한 TV장
거실 한 켠에 놓인 TV장은 집안 분위기와 어울리도록 나무로 제작한 것. 보석함, 인형 등 한식 소품과 시골길에서 주워온 말린 곡물을 함께 놓아 운치를 더했다.

▼ 거실 벽에 만든 시골 벽장(좌)
현관과 마주 보는 거실 벽면에는 시골 다락 느낌의 벽장을 짜 넣었다. 벽장 문고리에 달린 옥수수는 얼마 전 정선장에 놀러갔을 때 사온 것이다. 벽장 밑에 고가구 느낌의 테이블과 전화를 놓아 멋스럽게 꾸몄다.

▼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주방 문(우)
거실과 주방 사이에 한옥 문을 달아 공간을 분리했다. 식탁의 상판은 베란다 툇마루에 놓인 테이블과 같은 나무로 짜맞춘 것. 식탁 상판을 만들고 남은 나무를 툇마루의 테이블로 활용했다.

 

 

▼ 한식 벽장으로 포인트를 준 복도(좌)
현관에서 거실?들어오는 복도에는 한옥 문 모양으로 벽장을 만들었다. 벽장 선반에는 가족사진을 담은 액자와 도자기를 놓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 조명과 뒤주의 멋스러운 조화!(우)
현관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커다란 뒤주를 놓았다. 뒤주 위에는 한식 느낌의 조명을 달아 포인트를 줬다.

▼ 베란다 툇마루에 꾸민 미니 서재(좌)
베란다 툇마루의 끝에는 앤티크 책상과 의자를 놓아 미니 서재로 만들었다. 권용운씨가 가끔씩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

▼ 시골집처럼 정겨운 현관(우)
아파트 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공간. 바닥에 돌기와를 깔고 진주 펄이 감도는 회벽을 칠했다. 대문과 마주 보는 벽에는 한식 서랍장과 소품을 세팅해 시골집 분위기를 냈다.

 

▼ 소박하고 내추럴한 서재(좌)
브라운톤의 가구와 말린 꽃, 싱그러운 난으로 꾸민 서재. 바닥에 대나무 자리를 깔아 집안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도록 꾸몄다.

▼ 발품 팔아 구입한 한식 소품(우)
집안 곳곳에는 한지 보관함 등 다양한 종류의 한식 소품을 세팅해놓았다. 고가구 전문점에서 구입하거나 시골집에 있던 것들을 갖고 왔다고.

 

출처:여성동아

070616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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