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민비의 생가. 즉 태어난 곳이다.
지금까지 명성황후에 대하여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권력 다툼만을 일삼던 여인..그렇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해져온 이유는 일제 36년 동안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시켜온 탓이었다고 한다. 日本의 세력이 강해지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 외교의 균형을 갖추려 하였다. 여기서 일본의 미움을 받게 되고, 드디어는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인에 의하여 경복궁에서 살해되고 만다. 45세이었다. 소위 " 을미사변 "이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동학혁명이 전국을 휩쓸자, 조선을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군사파견을 요청한다. 일본도 이를 빌미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한다. 결국 淸日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 서양 삼국 즉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청일전재에서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치도 흔들리게 되는데, 이를 주시하던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에게 접근한다.
이에 일본은 1895년 10월8일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침입, 高宗을 위협하는 한편 피신하는 민비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가슴을 수차례 밟고, 이어 칼로 난자 살해하였으며, 그 시신을 궁궐밖으로 운반하여 소각하였다. 이때 변장하고 달아나는 민비를 대원군이 가르켜주었다고 한다. 이 을미사변은 아관파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긍정적 시각에서 요즈음 민비 즉 명성항후가 재조명되고 있으며 , 조선의 국모(國母)라고 일컬으며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되고 있다. 그 작품성은 별개로 하고, 명성황후에 대한 생가
(生家)의 안내문처럼 마냥 미화(美化)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죽음이 극적이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었던 점이 감성적인 애국심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가 입구에 공원이 조성되어있다. 항아리에 동전을 던져, 들어 가면 음악과 함께 분수가 올라 온다.
명성황후는 高宗 3년 1866년 ,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으로 16세에 왕비로 책봉된다.
그 후 대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고, 마침내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高宗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을 착수한다.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고, 청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으며, 1882년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프랑스와 수교 이후 개신교의 포교가 허락되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조치들이 고종이 주도한 것인지, 민비가 주도한 것인지? 그 것은 잘 모르겠다. 민비가 영특하였음은 알겠지만, 여전히 안 좋은 선입관은 지울 수 없다. 그의 죽음도 조선의 운명에 묻혀 별 감동이 없다.
1886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 (梨花學堂)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6.25 동란 당시, 총탄에 의하여 훼손되었다. 하마비(下馬碑)...대소인개하마(大小人皆下馬) 즉, 이 비석 앞을 지나 갈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태종 13년, 1413년에 종묘와 대궐 문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한다. 王이나 장군,고관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졌고, 명성왕후의 생가(生家)가 있기 때문에 세워진 듯....
이 生家는 본래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묘소를관리하기 위한 묘역이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 곳에서 살다가 1851년 명성황후 ( 민자영)을 낳는다.
명성황후의 탄강구리비 (誕降舊里碑)....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비석으로 27대 순종의 친필이라 한다. 탄강(誕降)은 王이나 성인(聖人)의 탄생을 말하며, 구리(舊里)는 고향을 의미한다.
1번 안채만 원래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복원한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민비에 대한 기록이 최근 발굴되었다. 고종과 민비를 가까이에서 모신 환관(宦官)의 기록이니 사실인 듯하다. 그녀가 풍악(風樂)을 몹씨도 즐겨했다는....
빨간색의 내용이 그 기록이다.
상감(고종)이 1864년에 즉위한 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19년동안 곤궁(坤宮..민비)은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시어 배우들을 궁중에 데려다가 노래 부르게 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묘기를 부리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 賞으로 하사한 金品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때문에 백성은 극도로 곤궁해지고, 국고는 탕진되어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배우들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었고, 軍人들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궁중에서는 비록 태평세월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민간은 만신창이가 된 빈사세상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하늘의 경고(천경.天警)"가 여러번 나타나고 人心이 흩어졌으니 武臣 변란인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몹시 가물어 논의 벼가 말라 죽고, 고을마다 화적떼가 들끓었다. 그래서 이 것을 하늘의 경고 즉 천경(天警)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섣부른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 구군(舊軍)병사들을 70%나 감축하여 실업자로 만들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여덟달치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이럼에도 민비는 연일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한마리 개가 짖으면 두마리 개가 따라 짖는 법이고, 일시에 짖어대면 천백마리가 떼를 지어 짖어대는 법이다. 한사람의 군졸이 주동하여 일어나면, 두사람의 군졸이 주창하여 일어나고, 일시에 제창하여 일어나면 5천명의 군졸이 호응하여 일어나게 된다. 원래 5영(營)의 군인은 5,772명이었다.이와 같은 다수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군료(軍料..봉급)를 여덟달치 지급받지 못한 군사들의 분통과 원망이 쌓여 동심동력으로 일시에 들고 일어나니 고함지르는 소리와 하나로 합친 형세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고, 비가 거꾸로 쏟아 붓는 것 같았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것과도 같았다.
이때 군인들은 궁궐을 향해 돌진하면서 곤궁(坤宮..민비)을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임오군란의 책임 소재가 민씨 일족에 잇었음을 말해주는 형세이었다.
이에 곤궁께서는 크게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대궐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마을로 달아났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워 어찌할 수 없는 이때에 어디서인지 8척 장신의 사나이가 홀연 나타나더니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위험이 눈앞에 닥쳐왔사오니 황송하오나 빨리 저의 등에 업히소서..하고 두세번 재촉하였다. 경황이 없는지라 누구인지도 모르고 곤궁이 사나이 등에 업혀 수구문(水口門)밖으로 나갔다. 이때는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가까스로 가마 한대를 불러와서 숭례문을 빠져나가 곧바로 남태령고개를 향해 한강가로 나갔다..
이후 민비는 장호원으로 가서 一族인 민응식의 집에 피신한다.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그녀의 옷을 태워 장례까지 치룬다. 그리고 민비는 몰래 사람을 高宗에게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통보한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안채이다. 마루와 좌,우에 방들 그리고 맨 오른편에 광이 보인다. 명성왕후는 여기서 태어나, 8세까지 여기서 어린 시절을 지낸다. 어린 시절 이름은 민자영이었다.
生家의 미화(美化)된 안내문 말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사실 그대로 요약해 보자. 흥선대원군은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친정 가족이 별로 없는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맞아 들인다.
그러나 대원군의 의도와는 달리 민비(閔妃)는 소녀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수완이 능란하였다. 민비는 왕비가 된지 수년 후부터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高宗을 대신해 나라일을 보고 있던 대원군과 사사건건 다투는 처지로 발전한다.
최익현의 상소(上疎)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민비는 민씨 일파를 불러들이고, 대원군이 고집하였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시행하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한편,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극심해지면서, 부정부패로 인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1882년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민비는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민비는 고종에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다음, 淸나라에 구원을요청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다. 淸나라는 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여 갔고, 민비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동학혁명으로 청나라 군대가 다시 조선에 들어 오자, 일본도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민비의 세력을 몰아 내고, 친일 개화파를 앞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민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몰아 내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1895년 8월8일 일본군대와 자객을 시켜 민비를 살해한 다음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친일정책을 펴던 정부는 민비를 평민으로 폐위(廢位)하였으나, 1895년 10월 다시 복권시킨다. 그리고 1897년 10월 고종(高宗)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 명성황후 (明成皇后) '
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궁이의 연통인 듯..... 특이하다
우물, 텃밭, 장독대, 화장실.....
원형 그대로.... 부엌이다.
원형 그대로...광(壙)이다. 창고...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군이 경복궁에 도착한 것은 고종32년(1895) 8월20일 새벽 5시경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은 훈련대를 인솔하여 궁에 난입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훈련대 연대장인 홍계훈(洪啓薰)이 급히 달려와 저지하자 일본 수비대는 총격을 가해 홍계훈을 죽인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은 건청궁(建靑宮...경복궁의 뒷편 민비가 거처하던 곳))을 향해 졸진, 도착한 후, 일본군은 합문을 포위하고, 자객들이 건청궁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일본군들은 총을 내려놓고 쉬고 있었다고 한다.
자객들은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민비를 찾아내어, 내동댕이 친후 구두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당시에 이들은 민비의 얼굴을 잘몰랐기에 민비와 비슷한 용모의 宮女 3명도 살해하였다. 민비의 시신은 얼마 뒤에 궁에 들어온 미우라공사(公使)에 의하여 재확인되었고, 그의 지시로 증거를 없에기 위하여 불태워졌다. 시신을 문짝위에 얹고 이불을 덮어 건청궁 동쪽 녹원 숲속으로 운반한 다음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민비의 나이 45세이었다.
다음 사진은 감고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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