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生家...

 

 다산 정약용 (1762~ 1836)...조선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實學)을 집대성하였다. 실용지학(實用之學)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7893年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 무렵 西洋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접하게 된다.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나, 30대 초반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암행어사,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土地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계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한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토지의 사유(私有)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주장하여 농민들의 투하 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배분하자는 공동농장, 협동농장적 경영론이었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이러한 사회개혁론과 더불어 그는 저서 원목(原牧)에서 놀라운 정치적 주장을 전개한다. 즉, 옛날부터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하여 이장(里長), 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하였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일 민(民)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民은 자유의사로서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유럽의 사회개혁론과 유사한 것으로 政治의 민주주의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발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 불가능한 理想論이었고,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僻派)는 남인계의 시파(時派)를 제거하기 위하여 1801년 2월,천주교도(西學)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켰다.

 

이때 정약용은 그의 형인 약전(若銓), 약종(若鐘), 이승훈,이가환,권철신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2월27일 출옥과 동시에 포항으로 유배되었다가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곳에서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다산은 1818년,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 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鄕村 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다산은 18년동안의 유배생활에서 그 유명한 일표이서(一表二書)...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한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고, 목민심서에서는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바탕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 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였다. 흠흠신서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獄事)에 대하여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하고자 저술하였다,.

 

즉 경세유표는전국적 범위에서 국왕, 국가가 집행하여야 할 것들에 대하여 저술한 것이며, 목민심서는 군현(郡縣) 등 향촌(鄕村)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에 대하여 저술한 것이다.  

 

茶山은 이런 저술등을 통하여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 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商業의 경우 農業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여 했다. 상업을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中小商人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기술도입, 국가적차원의 토목기술 발전,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류유통을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 鑛山을 국영화함으로써 천연의 富에 대한 특권층의 恣意的 이용을 배제하여 그 이익을 소농민에게 돌리게 하는 등의 광산국영론 등을 주장하고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5년 일부 축소하여 복원되었다.

 

 

 

茶山은 그를 총애하던 正祖가 죽자 곧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관직 제의를 물리치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학술 연구에 전념한다.

 

코끼리가 살얼음판을 걷듯이, 원숭이가 주위를 항시 살피듯이 살아야 했으며,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는집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그렇게 살았다.

 

 

다산이 제기하는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朱子學)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1.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는데 반하여,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것으로 생각하였다.

 

2. 氣質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베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의 능력주의는 身分制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과거,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3. 욕망관(慾望觀)에 대하여,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망을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고 파악한 다산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이는 주관적 심성문제에 치중하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구별되는 주장인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하였다. 이에 따라 천문, 기상(氣像),지리, 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관심을 갖고 ...볼록렌즈가 태양광선의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등을 밝혀냈다.

 

또한 각종 藥草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하여 생물학적 연구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하였다.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수원화성의 축조시 거중기, 고륜(鼓輪), 활차(滑車)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하였다. 이와함께 기예론(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 의학등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다산의 詩 한편 .....독소(獨笑....혼자웃다) 

 

유율무인식  (有栗無人食)         양식이 많은 집에는 자식이 귀하고

다남필환기  (多男必患飢)         아들 많은 집에는 굶주림이 있으며

달관필창우  (達官必猖愚)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자무소시  (才者無所施)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를 펼 길이 없으며

가실소완복  (家室少完福)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도상능지  (至道常陵遲)         지극한 도(道)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옹색자매탕  (翁嗇子每蕩)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부혜랑필치  (婦慧郞必癡)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어리석으며

월만빈치운  (月滿頻値雲)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화개풍오지  (花開風誤之)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물물진여차  (物物盡如此)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거야

독소무인지  (獨笑無人知)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歲寒松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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