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주택들

[스크랩] 개실마을

afarm 2010. 1. 19. 12:26

개실마을....

연산군 무오사화 때 화(禍)를 당한 김종직의 5대손이 이 마을로 피신 와 은거하며 살던 곳...꽃 피는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마을이라 하였으나 , 그 후 줄여 개실마을이 되었다. 그 후 김종직의 후손들이 400여년간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을 이룬 마을이 된다.

 

무오사화(戊午史禍)란 ? 김종직은, 조카인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世祖)를 비판한 글(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썼었는데, 후일 연산군 시절 반대파가 이를 문제삼아, 사림파들을 죽이거나 축출한 사건이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관을 ?어내, 목이 베이는 화를 당한다.

 

 

 

 선산(善山) 김씨 문정공파(文定公派)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종택(宗宅)으로 1800년에 건립되었다.  김종직(1431 ~ 1492)은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성리학,영남 사림파(士林派)의 종조(宗祖)로서, 성리학에 근거한 개혁 정치를 펼쳤다.  성종시대에 도승지, 형조판서를 지냈으나, 후일 연산군 시대의 무오사화로 무덤을 파헤쳐 다시 목이 베이는 소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그 후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 때 다시 복원된다. 그리고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김종직은 나의 36대  할아버지가 된단다...

 

 

 호(號)인 점필재의 뜻은... 책을 엿보는 집이란 의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이 화장실이다. 이제 이 마을도 여느 시골처럼 쇄락해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대문이 정겹고, 옛 생각이 난다. 우리 집도 저런 대문이었는데....

 사당과 사당 뒷산의 대마무 숲

 

 도연재 (道淵齋) ...김종직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학자들이 고종 원년 1886년에 세워, 유학생을 가르치거나 제사를 준비한는 곳이다.

 

 

 

 

이 비석은 합천에서 고령을 거쳐 서울의 임금에게 향하는 진상품(進上品)을 서로 인수인계한 곳에 세운 비석이다. 합천군수와 고령 현감이 진상품의 인수인계 장소를 확정하고, 서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841년 1월에 세워진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부친인 김숙자(金淑滋)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은 원래 경북 선산 사람이었으나 모친 밀양 박씨와 결혼하면서 , 장인이 왜국 대마도 전투에서 전사하자 밀양으로 이사하여 김종직을 낳았다. 16세에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21세에 결혼하여 이듬해 1453년(단종1년)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가 3년동안 여막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성종시대에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1459년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한다. 성리학적 실천 윤리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수많은 문하생들이 함양으로 모여 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詩를 지어 시판을 걸어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지 않게 보고 있던 김종직은 그 시판을 떼어 불태워 버렸는데..이로 인하여 유자광과 감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후일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함양군수 시절 선정(善政)을 베풀어 1476년 선산부사로 승진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낙향,모친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띠집을 지어 지냈다.  세상 일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성종의 거듭된 벼슬길을 사양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한성부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종직의 학문은 고려 말 정몽주 및 길재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버지로부터 배워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으며, 문하생으로 정여창, 김일손, 김굉필, 남효온 등 수많은학자를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적 계통을 보면,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퇴계.이율곡 등으로 이어지는데, 길재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천적 방면에 힘을 쓴 것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당시 훈구공신파 일색이던 조정에 문하생들을 많이 진출시켜 신진 사림세력(士林勢力)을 형성함에 따라 훈구파와 심한 반목과 대립이 생겨났다.

1489년 (성종20년),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김천으로 내려 와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이 때 성종은 녹(祿)을 내렸으나  세번이나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이에 성종은 어사품을 내리고, 그의 청빈함을 듣고 경상도에 지시하여 쌀 70석을 내렸고, 의원을 보내 약을 하사하였다.

 

1492년 (성종23년), 밀양 외가에 갔다가 병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8월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고 애도하였으며, "문간"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난한 글)을 지은바 있는데, 연산군 시절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하생  33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며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나 , 주위에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오늘에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신원이 회복되고 영이정으로 추존되면서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출처 : 非 山 非 野
글쓴이 : 해인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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